스트레스 용사 모험담
1. 첫 번째 퀘스트: 스쿼시 마을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스트레스 용사님. 새로운 모험에 적응해보세요! 본문
뭐든 처음 할 때 나는 '적응'이 제일 괴롭다. 세상의 모든 겁이 다 저 단어에 응축되어 있을 정도로. 난 용사의 덕목에 가장 어긋나는 부분을 가지고 있다. 두려움. 세상에 그러고도 용사라고요? 네. 원래 게임이나 소년만화는 주인공이 성장하는 이야기니까요. 이게 자신감이죠. 보세요. 이 당당함.
"나는 겁쟁이에요."
이렇다보니 '시작'은 공포 그 자체다. 나는 될 수 있는대로 시작을 미루고 거기에 '준비'라는 이름을 붙인다. 그리고 내 정신을 위로한다. 너 왜 안하고 있어? 아, 아직 준비가 덜 돼서. 준비 다 하면 할 거야. 이미 굳어져 '신중함'으로 포장된 이 행동은 스쿼시를 시작했을때도 똑같이 나타났다. 다만, 이미 돈을 지불했다는 차이가 있었다.
2023년 1월, 나는 스포츠 센터를 가기 직전까지 구글과 네이버, 트위터(였던 지금 X)에 ‘스쿼시’를 반복해서 검색했다. 피할 수 없다면, 예측이라도 해야지. 어떤 위안도 없고, 검색이 나를 대신해서 스포스센터를 가 줄 수 없는데도. 어떻게 될까. 뭘 어떻게 해야하지. 생각이 물처럼 퐁퐁 솟아올랐다. 그렇게 원할때는 솟아오르지도 않는게. 꼭 이럴 때만 창의적인 미래를 그려준다.
생소한 장소에서, 처음보는 사람들과 함께 처음보는 선생님과 뭘 배운다? 정말 완벽한 코즈믹 호러! 심장이 벌렁거리고 식은땀이 나고, 호흡이 가빠지면서 눈을 빠르게 굴린다. 크툴루와 대면한 사람들이 이랬을까. 일상에서 맛보는, 오직 나만을 위해 준비된 크툴루 신화¹. 오오 위대한 스쿼시시여. 그대는 어디서 온 외계인인가요?
그렇게 코즈믹 호러²적 두려움'만' 가지고 간 첫 날. 이미 경기장엔 익숙한 듯 몸을 풀고 공을 치는 사람들이 있었고 나와 같이 밖에서 서 있는 분들이 있었다. '처음' 등록한 뉴비가 일곱 명, 이미 있던 분 다섯 명. 총 열 두명이 경기장에 들어찼다. 간단한 그립과 자세를 배우고 라켓을 가지고 공을 튕기거나 벽에 맞은 공을 치는 이른바 '공과 친해지기 놀이'를 했다. 우왕좌왕하면서 공을 놓치기만 하는 사이 오십분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그리고 두 번째 시간부터는 본격적으로 공을 쳤는데 나는 공을 맞추기도 힘들었다. 같은 날 처음 쳐본 다른 분들은 잘 치고 앞 벽까지 맞췄다. 그렇게 공을 치고 난 다음엔, 공을 앞 벽에 쳐서 뒷사람이 받을 수 있게 토스를 해주는 활동도 했는데, 계속 내 앞에서 공이 끊겼다. 나는 정확히 민폐용사가 되었다. 공을 너무 못쳐서 다음 사람이 받을 수가 없었다! 그 날 이후 수업을 마치고 20분 정도 연습을 했다. 심지어 토요일날에도 나가서 연습을 했다. 게임을 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혼자 벽치기를 하는 초보라니. 나는 심한 부끄러움을 느꼈다.³ 그럼에도 눈에 보이게 나아지는게 없었다. 여전히 공을 놓쳤고, 어쩌다 친다 해도 공이 앞 벽을 맞지도 않았다. 그렇게 두 달이 되는 동안, ‘스쿼시를 배우러 가는'게 두려워졌다. 같이 치는 분들은 친절하고 좋았지만. 나는 스쿼시에 적응하지 못한 채 꾸역꾸역 ‘매달려’있었다. 선생님께 늘지 않는다는 푸념과 회의를 언급했지만, 뚜렷한 답도, 격려도 없었다.
그래도 민폐를 끼치지 않으려고 꾸역꾸역 남아서 연습을 하고, 매 강습 시작 전에 빠르게 뛰는 심장을 진정시키면서 빠지지 않으려고 노력했지만 그럴수록 심한 회의감만 느껴졌다. 성실한 연습이 언제나 좋은 결과를 보장해주지는 않으며 때로는 포기해야 할 수도 있다는 사실이 머리 속에 아른거렸다. 심지어 늦게 들어온 사람이 나보다 더 공을 잘 맞추고, 공을 벽으로 보냈다!
'이제 정말 그만해야 하나' 하는 생각이 스쿼시 강습 내내 나를 지배했고, 집에 가서는 절망과 회의에 수반하는 우울을 풀어놨다. 나는 엄마에게 물었다. 용사에게도 엄마는 있으니까. 그러면서 나는 남은 기간 강습에 결석을 했다.
엄마는 나에게 결정 그 자체를 줬다. '이번달 까지만 하고 안되면 그만해.'
다만 나의 억울함은 나를 쉽게 놔주지 않았다. 남아서 연습하는 사람은 난데, 왜 나만 제자리이며, 선생님은 피드백도 없는걸까. 나의 문제일까. 아직 적응을 못해서? 두려워 하니까?
선생님은 여전히 나에게 큰 관심이 없었다. 피드백을 주거나 말을 거는 경우도 많이 없었다. 물론 이건 전적으로 나의 입장이며, 내가 경계심이 높은 사람이라 그렇다. 스쿼시 어려워요? 네. 이 한 번의 질문과 답 이후로 선생님은 내게 큰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피드백도 별로 없고, 나보다는 내 앞 뒤로 공을 치는 사람에게 더 많은 관심을 주셨다.
하지만, 나는 이렇게 놓고 싶지 않았다. 정말 놓고 싶지 않았다. 그게 인정욕구든 열등감이든 뭐든.
나도 공을 제대로 쳐서 벽으로 보내고 싶었다.
저 생각 하나로 나는 끝끝내 줄에서 손을 놓지 않았다. 다시 줄 위로 올라가 줄타기를 시작하다니. 니체가 있었으면 줄을 끊어 놨을거다.⁴
그렇게 계속 강습을 받고 연습한지 11개월차, 지금도 여전히 스포츠 센터를 가기 전엔 심장이 벌렁거린다. 가기 싫다는 생각도 한다. 그래도 결석은 하지 않으려 하지만. 이젠 중급반으로 옮겨서 똑같이 친절하고 따뜻하며 나를 격려해주는 새 동료들과 함께 수업을 받는다. 저 시간을 지나온 때와 달리 이젠 공을 앞으로 보내고 랠리도 한다. 그렇지만 아직도 절망하고 회의적이 되기도 한다.
-오, 용사님, 첫 번째 퀘스트를 아직 완료하지 못하셨군요. 네. 아직 [진행중]이랍니다. 무슨 문제라도 있을까요. 아니요. 용사님만 그런게 아니라서요. 다들 진행중이세요. 아!
1. 크툴루 신화(Cthulhu Mythos)는 미국의 호러 작가 어거스트 덜레스(August Derleth)가 만들어낸 조어로, 하워드 필립스 러브크래프트의 저작물을 기반으로 후대의 작가들이 보충한 일련의 신화 체계이다. 출처:위키백과 https://ko.wikipedia.org/wiki/%ED%81%AC%ED%88%B4%EB%A3%A8_%EC%8B%A0%ED%99%94
2. (코즈믹 호러에서 넘어옴) 우주적 공포(宇宙的恐怖, 영어: cosmic horror 코스믹 호러)란 미국의 소설가 하워드 필립스 러브크래프트가 자신의 괴기물에서 발전시켜 제시한 문예철학이다. 하나의 주의로서는 우주주의(영어: cosmicism 코스미시즘)라고 한다. 러브크래프트의 공포관을 요약하면 이 우주에는 우리가 인지할 수 있는 신적 존재, 예컨대 기독교의 하나님 같은 것이 없으며, 은하간 우주 수준의 거대한 규모에서 인간은 딱히 유의미한 존재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래서 러브크래프트식 괴기물에서는 인간이 자신과는 비교할 수 없이 거대한 우주를 대면하고 자신의 무의미함을 받아들이지 못해 공포에 질리고 미쳐 버리는 것이다. 즉슨 우주의 공허에 대한 두려움이 바로 우주적 공포다. 출처: 위키백과 https://ko.wikipedia.org/wiki/%EC%9A%B0%EC%A3%BC%EC%A0%81_%EA%B3%B5%ED%8F%AC
3. 무진기행의 맨 마지막 구절. 김승옥 저, 「생명연습」, 문학동네(2014), P256.
4. 니체의 줄타기 알레고리는 잔인하다. 프리드리히 니체 저, 장희창 옮김,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민음사, P25-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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